‘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서울이 무너진 뒤 마지막 생존자들의 피난처가 된 아파트에서, 위기를 기회로 권력을 쥔 평범한 남자 영탁과 끝까지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명화의 갈등을 통해, 진짜 재난은 붕괴가 아니라 연대 없는 생존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묻는 이야기다.
1. 국내외 평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단지 재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니다. 그 잔해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고, 어떤 얼굴로 서로를 대하게 되는지를 날카롭고도 서늘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일까, 국내외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한 흥미나 재미를 넘어,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국내 평단은 이 영화를 두고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디스토피아’라 표현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파트 문화, 공동체의 이기심, 타인을 경계하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태도—이 모든 것이 너무도 한국적인 정서 속에 정확히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극장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내 등을 꾹 눌러 앉힌 듯한 감정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익숙한 풍경에서 너무 낯선 진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해외 영화제와 언론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영화는 2023년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되었고, 외신들은 ‘사회적 메타포가 강렬한 한국형 서스펜스’라고 평했다. 단순한 재난 영화의 틀을 벗어나, 인간 내면의 어둠과 구조적 모순을 짚어낸 점에서 호평을 받은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 특유의 주거 구조와 서열화된 커뮤니티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세계적으로도 공감대를 형성했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영화가 가진 날카로움과 보편성이 동시에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영탁이라는 인물에 대한 다양한 국가의 관객 반응이었다. 누군가는 그를 ‘권력의 중독자’라며 비난했고, 누군가는 ‘비극적 피해자’라며 연민을 표했다. 그만큼 이 영화는 단편적인 결론을 강요하지 않으며, 관객 스스로 끝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그 여운이 길고 깊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가’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나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단순한 한 편의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짐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우리가 믿어왔던 윤리와 공동체의 틀을 흔드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찬사와 불편함을 동시에 끌어안으며, 한국 영화가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해 내민 묵직한 질문표였다.
2. 주인공 영탁 - 인물의 변화 포인트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은 처음부터 권력욕에 들뜬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엔 누구보다 평범했고, 오히려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인상마저 주었다. 그러나 그가 아파트 주민 대표로 선출되는 순간부터, 무너진 세상 위에 질서를 세우려는 듯한 그의 말투와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나는 그 변화가 단순히 외부 환경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탁의 내면 어딘가에는 오래전부터 숨겨온 열망, 혹은 상처가 있었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폐허 위에서 살아남은 이들 사이에선 마침내 누군가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이전의 영탁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권위를 쥔 손으로 점점 사람들을 통제하고, 규칙을 만들며, 마치 정의로운 지도자인 척 행동하는 모습에서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처음엔 다수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결정하던 그의 선택들이, 어느새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결국엔 자신이 만든 질서에 취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이 얼마나 쉽게 권력에 중독될 수 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영탁의 진짜 변화는 외면보다 내면에서 시작된다. 그가 입는 옷, 말하는 태도, 걷는 방식이 달라진다기보다, 그가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더 이상 연민이 깃들지 않는 그 순간—그게 나에겐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질서의 수호자라 믿었지만, 그 믿음은 자기합리화로 굳어졌고, 결국 자신이 무너뜨린 수많은 삶들 위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이 가장 미워했던 이기적인 인간상과 닮아 있었다. 나는 영탁이 끝내 어디까지가 진심이었고, 어디서부터 괴물이 되어버렸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슬펐다. 변화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깊숙하게 스며들고,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이 영화는 영탁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가진 권력의 욕망이 얼마나 쉽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걸 보며 나는 묻는다. 나라도 그 상황에서 다르지 않았을까? 영탁의 얼굴은 결국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 어딘가를 비추고 있었기에, 그의 변화는 단지 영화 속 인물의 궤적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거울 같았다.
3. 사건의 흐름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사건은, 마치 아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지진처럼 삶을 뒤흔드는 충격으로 시작된다. 모든 것이 무너진 도시, 흙먼지와 절망이 뒤섞인 폐허 속에서 홀로 우뚝 선 한 아파트—그 안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남은 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처음엔 그저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내는 이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공동체 안에 감춰졌던 욕망과 두려움이 서서히 드러난다. 외부인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배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크고 무거운가. 나는 이 영화의 전개가 단순히 재난의 생존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인간의 내면에 잠든 권력 본능이 언제 어떻게 깨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친절했던 인물들이 어느새 권위와 통제의 언어를 익히고, 희생을 가장한 배제와 이기심으로 공동체를 재편하기 시작한다. 박씨가 주민 대표로 올라서며 질서가 생긴 듯 보이지만, 그건 사실 질서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또 다른 혼란이었다. 그가 만든 규칙은 공정을 가장한 도구였고, 나는 그가 차분히 말할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극이 진행될수록 경계는 명확해진다.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 선택받은 자와 밀려난 자. 그리고 그 경계는 점점 더 잔혹하고 차가워진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프게 느낀 건, 결국 아무도 거대한 악을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평범했던 사람들이,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해나간 것이다. 영화의 흐름은 격렬한 폭력이나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에서 피어나는 불신과 욕망으로 점점 붕괴되어 간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튼튼한 외벽 안에서, 인간의 마음은 가장 먼저 무너졌다. 그리고 나는 그 무너짐이 너무도 익숙하고 현실적이라 더 씁쓸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사건은 재난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본질은 인간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결코 멀지 않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