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슬립’ 같은 한국의 한 사립고에서 숫자로만 정의되던 삶 속, 망명한 수학자 이학성과 길을 잃은 소년 한지우가 만나 서로에게 사고의 자유와 존재의 온기를 건네며, 수학을 통해 ‘왜’라는 질문을 나누고 진짜 배움의 의미를 함께 써내려간 이야기다.
1. 서사 구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머리로 푸는 이야기 같지만, 끝내 마음으로 풀어야 하는 서사였다. 이 영화의 중심엔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정체를 숨긴 채 고등학교 야간 경비원으로 살아가는 이학성, 다른 하나는 수학에 대한 흥미는 있지만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고등학생 한지우. 이 둘이 처음 마주했을 때, 그 관계는 질문과 침묵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수학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서로의 외로움과 결핍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 이들의 서사는 단순한 성장담 이상이었다. 나는 이학성을 보며 처음엔 그저 천재 수학자였던 사람의 몰락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몰락보다는 망설임과 책임, 그리고 무언가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바람으로 가득했다. 지우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스승이라기보다는 동료에 가까웠고, 정답을 강요하지 않고 사고의 방식과 질문의 힘을 건넸다. 나는 그런 이학성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진짜 가르침은 정해진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게 해주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반면 지우는 수식보다 사회가 강요한 틀 속에서 점점 눌려가던 인물이었다. 모의고사 점수로 평가받는 학교, 공부를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는 수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아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학성과의 만남 이후, 그는 수학 안에 숨은 철학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알아가며 점차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간다.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전형적인 도제식 성장 서사 같지만, 그 안에는 낡은 틀을 거부하는 유연한 전개가 흐른다. 사제 관계는 일방적인 위계가 아닌, 서로의 고백과 경청 속에서 형성된다. 나는 이 흐름이 참 좋았다. 억지 감동을 끌어내지 않으면서도, 어느 순간엔 가슴이 뻐근할 만큼 따뜻하고 묵직했다. 결국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수학을 매개로,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비추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학이 삶을 설명해주는 유일한 언어는 아니지만, 생각하는 법을 알려주는 창이라면, 그 창을 함께 들여다본 두 사람의 여정은 세상 어떤 수식보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그 여정을 지켜본 관객으로서, 조금은 더 나은 질문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2. 망명자의 칠판 위에 핀 희망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가장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풍경은 검은 야간복을 입은 이학성이 칠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망명자였다. 조국을 등지고 이름조차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 세상이 그에게 수많은 것을 빼앗았지만, 단 하나—숫자를 향한 믿음만은 빼앗지 못했다. 나는 그가 들고 있던 분필 하나가, 어쩌면 총보다 더 큰 힘을 지닌 도구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야간 학교의 한 구석, 칠판 앞에 서서 수학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그저 문제를 푸는 사람을 넘어, 절망 속에서도 자신만의 언어로 희망을 세우는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안쓰러움이 아니라 존경이었다. 세상이 등 돌린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가능성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런 이가 가르치는 수학은 단지 정답을 찾는 연습이 아니라, 의심하고 관찰하며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알려주는 철학이었다. 칠판 위에서 이학성이 적어나가는 기호와 수식들은 마치 지우에게 건네는 은밀한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너는 지금 충분히 괜찮다고,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도 괜찮다고.’ 나는 그런 가르침이야말로 진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커리큘럼이나 입시 성적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 이학성은 지우에게 그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쓴 분필은, 외롭고 무력한 학생의 마음 한복판에 조용히 빛나는 도화선을 그어주었다. 세상은 수없이 시험지를 내밀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늘 마음속에 있다. 누가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해 명확한 정답을 주진 않지만, 망명자의 칠판 위에서 피어난 질문 하나는 분명히 말해준다. “틀렸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다시 풀면 된다.” 그 말 한 줄이 나를 울렸다. 이학성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설 자리를 잃은 채 떠도는 삶 속에서도 누군가의 꿈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 무언의 헌신과 믿음,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지식과 시간을 나누는 용기가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정의였다.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그런 칠판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품어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자꾸 묻게 된다.
3. 공부의 본질은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하기 위한 과정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보며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건, 공부란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진실이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공부를 점수로 환산하고, 등수로 줄 세우며, 정답 맞히기에만 집착해왔다. 나 역시 그런 체계 안에서 자라왔다. 문제를 풀기보다는 정답을 외웠고, 이해보다는 속도를 먼저 배웠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이학성의 수업은 달랐다. 그는 지우에게 단 한 번도 ‘이게 맞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넌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는다. 그 물음 하나가 얼마나 낯설고 동시에 따뜻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공부는 결국 나를 알아가는 도구여야 한다.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며, 어떤 문제 앞에서 멈추고 싶은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이학성은 칠판에 수식을 적는 대신, 머릿속의 벽을 하나하나 허물어준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 틀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끝까지 자신의 방식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을 그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지우에게 심어준다. 나는 그런 장면들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언젠가부터 나도 누군가에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대신, ‘외워라’, ‘따라 해라’고 말해온 건 아닐까. 이 영화는 공부가 얼마나 개인적인 행위인지,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한 사람의 세계가 얼마나 조용히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우가 수학을 통해 단순히 문제 푸는 능력을 갖춘 게 아니라, 자기 존재를 믿게 되는 과정을 나는 지켜보며 여러 번 마음이 찡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진심으로 공부에 지친 누군가에게 꼭 권하고 싶다. ‘공부는 원래 힘든 거야’라는 말보다, ‘공부는 너의 방식으로 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드문 영화니까. 진짜 공부란 정답을 빨리 찾는 일이 아니라, 질문 앞에 머무를 줄 아는 태도라는 걸, 이학성과 지우는 말없이 증명해낸다. 그 배움의 풍경은 말 그대로 조용히 피어나는 성장의 그림자였고,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울림을 느꼈다. 결국 공부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알아가기 위해 스스로 시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 영화가 조용히 일깨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