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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기차, 여정과 계급도, 설국의 바깥

by obzen 202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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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는 계급과 통제로 굳게 닫힌 열차 안에서 인간다움을 되찾기 위한 피의 여정을 따라가며, 결국 진짜 변화는 시스템의 안이 아닌 바깥을 향한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눈 덮인 세상 위에 새겨진 첫 발자국은 생존을 넘어선 선택의 선언이었고, 그 걸음은 차가운 질서 속에서도 끝내 따뜻한 삶을 꿈꾸는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1. 피로 만든 길, 인간으로 가는 여정

영화 '설국열차'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막연히 그려졌을 법한 디스토피아가, 너무나 현실적인 숨결로 스크린 위에 그려진 작품이었다. 세상이 얼어붙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들이 타고 있는 단 하나의 열차, 설국열차. 그 긴 열차의 맨 끝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단지 앞칸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넘어, 인간이 가진 본능과 제도, 갈등과 희망을 한 겹씩 벗겨내며 우리에게 묻는다. 어디까지가 운명이고 어디부터가 선택인지. 커티스가 이끄는 꼬리칸 사람들은 먹을 것도, 빛도, 자유도 없이 그저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통제되고 있었고, 그 안에는 오래전부터 쌓여온 절망과 분노가 고요하게 침전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반란을 꿈꾸고, 누군가는 그저 아이들을 지켜내고 싶었으며, 어떤 이들은 그 현실에 체념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늘 같은 속도로, 같은 궤도를 달릴 뿐이었다. 그런 열차 안에서 커티스는 '앞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문 하나하나를 피로 열고 나아간다. 각각의 칸은 하나의 사회, 하나의 계층이었다. 폭력과 향락, 사치와 교육, 그 모든 것이 칸마다 정해진 질서대로 존재했고, 그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단면을 꼭 닮아 있었다. 잔혹함과 기이함, 그 사이에 놓인 아이러니를 지나 결국 엔진칸에 다다른 커티스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과연 정답인지, 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파괴 없이 가능한지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은 결국 생존 그 자체보다도 더 무거운 윤리의 문제로 흘러간다. 이 영화는 ‘계급’이라는 단어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을 품고 있다. 냉혹함 속의 연민, 규칙 아래 숨어 있는 광기, 그리고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희망. 결국 설국열차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고백이다. 추운 세상을 달리면서도 온기를 찾아가는 이야기, 얼음으로 뒤덮인 지구 안에서도 다시 생명을 품으려는 시도, 그것이 이 영화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에 커티스가 마지막에 마주한 선택은 단순한 엔진 정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열차 위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끝없이 반복되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과연 무엇을 바꾸는 것이 진짜 변화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윌포드가 제안한 안정된 질서를 받아들이는 대신 커티스는 불확실한 바깥세상이라는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고, 결국 그 결정은 열차가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아이 하나가 눈 속에서 곰을 마주할 수 있었던 장면은, 생존을 위한 질서가 아닌, 삶을 위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강한 함의를 남긴다. 세상이 멈춘 자리에 다시 봄이 올 수 있다면, 그건 누군가의 용기 덕분이 아닐까. 설국열차는 그 용기의 얼굴을 커티스를 통해, 그리고 관객의 마음속으로 깊이 새겨넣는다.

2. 앞칸으로 향하는 길, 피로 그어진 계급도

설국열차를 보고 나면 문득 숨이 막히는 것처럼, 어디선가 들리지 않던 소음을 듣게 된다. 그건 단지 열차의 굉음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온 세계의 소리였다. 꼬리칸에서 시작된 커티스의 여정은 단순한 반란도 아니고 단지 계급 상승을 위한 싸움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가 문을 하나씩 열 때마다, 누군가의 자리를 밀어내는 대신 왜 이 구조가 이렇게 설계되어야 했는지를 끝까지 묻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식물 칸의 초록은 아름다웠지만 그 생기에는 배제된 이들의 삶이 깃들지 못했고, 분홍빛 교사의 칸에서 반복되는 교육은 생각을 지우는 훈련에 불과했으며, 아이를 부품 삼아 굴러가던 앞칸의 기계 안에는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잔혹함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장면이 하나의 진짜 질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자연스럽게 나뉘어 있는가, 왜 이 선은 지워지지 않는가. 커티스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자신이 원하던 자리가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가장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팔을 내어주는 그 순간은 지배의 손이 아니라, 연대의 손이었고, 그래서 더욱 아팠다. 설국열차는 결국 속도나 목적지가 아닌 방향을 묻는 영화였다. 끝없는 선로를 달리며 바깥을 보지 못한 채 ‘더 나은 자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꿈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조용히 되묻는다. 열차는 멈추고, 눈은 그친다. 커티스가 보여준 건 승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멈추는 용기였고, 그 용기야말로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마지막 눈밭을 떠올린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자, 이전의 질서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조용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3. 끝이 시작이 되는 설국의 바깥

‘끝이 시작이 되는 설국의 바깥’이라는 말처럼, 나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온 세상을 삼켜버린 듯한 눈과 침묵, 그 안에서 막 태어난 새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맴돌았다. 열차는 멈췄고, 구조는 무너졌고, 많은 이들은 그 안에서 사라졌지만, 아이와 요나는 살아남았다. 커티스가 지켜낸 아이, 남궁 민수의 딸 요나, 이 둘은 더는 계급도 위에 얹힌 숫자가 아니라, 스스로 걷는 존재가 되었다. 새하얀 설원 위, 그 누구의 명령도, 보호도, 통제도 없는 공간에서 그들이 바라본 북극곰은 위협이 아닌 가능성이었다. 생명이 이토록 황량한 곳에서도 살아 있다는 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상징처럼 다가왔고, 나는 그 장면이 마치 ‘세계의 숨’ 같았다.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모든 것은 선 안에서만 돌아갔고, 모두가 바퀴 안의 톱니로 살아갔다. 하지만 멈춘 순간 비로소 ‘밖’이 생겼고, ‘선택’이 생겼고, 그 속에서 인간다움이 다시 깨어났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 건, 눈보라가 아니라, 그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려는 존재의 가능성이었다. 설국열차는 결국 한 줄의 메시지를 남긴다. 아무리 정교하고 오래된 시스템도, 그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부서져야 하고, 바깥의 숨결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문 하나를 여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걸. 우리도 언젠가 자신의 열차에서 내릴 수 있을까, 그 하얀 바깥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 정해진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첫 발걸음으로 삶이 시작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깊이 있는 울림으로 전해주었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만약 그 바깥이 여전히 춥고 험난한 세상이라 해도, 열차 안에서 정해진 운명을 따라 사는 것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삶일 거라고. 선택이 가능하다는 사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감각만으로도 그들의 발끝엔 온기가 깃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안정을 자유라 착각하며 익숙한 틀 안에 머물지만, 진짜 자유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함께 온다. 요나와 아이가 처음으로 눈밭 위에 남긴 발자국은 단순한 이동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주체가 되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들에겐 다시 누군가를 따를 필요도, 누군가에게 순서를 기다릴 이유도 없다. 세상이 다시 차가워지더라도, 그 발자국은 더 이상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설국의 바깥’은 낯설고 무서울지 몰라도, 적어도 그곳에선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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